아니 벌써 정년퇴임을 했느냐는 인사를 자주 받고 있다. ‘요즘은 아무나 정년합니다’라는 싱거운 응답을 하면서 지난 6개월을 보냈다. 1986년 9월, 서울대학교 미생물학과에 조교수로 부임한 후 36년만인 2022년 8월, 서울대학교 생명과학부 교수직을 벗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퇴임을 하기 직전 생명과학부 교수들과 제자들에게 정년기념 강연을 하며, 그동안 해왔던 일들과 앞으로의 계획을 나눌 기회가 있었다. 이 글에서는 그때 했던 이야기들을 지면을 통해 나누고자 한다.

대학원과 포닥

   학부를 졸업한 1979년에 유학을 떠나, 미국 Wisconsin 대학교 Madison 캠퍼스에서 박사학위와 포닥을 하며 7년을 보냈다. 1950년대 DNA의 구조 발견에 이어서, 유전자의 발현체계, 발현조절에 대한 연구와 발견들이 급물살을 타며, 단백질 구조분석에서 출발한 분자생물학의 지평이 하루가 다르게 팽창하던 때였다. 다학제 프로그램인 분자생물학 전공으로 입학하여, 화학과/생화학과 Tom Record 교수님의 지도로, 대장균의 RNA중합효소가 프로모터를 인지하고 open complex를 만드는 과정을 물리화학적으로 분석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어서 같은 캠퍼스의 McArdle 암연구소에서 SV40 DNA종양 바이러스가 RNA processing을 하는 과정을 분석하며 포닥연구를 수행하였다. 그즈음, 교수채용방식을 비공개에서 공개채용(공채)으로 바꾼지 얼마 안된 서울대학교에서 유전공학을 전공한 교수를 뽑는다는 공채공고가 났고, 별다른 내부정보(?)없이 무작정 지원을 하였다. 너무 어린 여자교수를 뽑는 것에 대해 다양한 반대가 있었다고 하나, 앞날을 내다보신(?) 선배교수님들의 탁월한 선택으로 임용이 결정되었고, 둘째의 출산으로 1년간 임용유예를 한 후 1986년 만 29세에 서울대학교 미생물학과로 부임하였다.

조교수 부임

  신참 조교수로 부임은 했으나, 별도로 배정된 연구실도 실험실도 없었다. 일년간은 바로 위 선배인 정가진교수의 사무실에 책상을 넣어 함께 지냈고, 실험실은 학부생 실험실습실 하나를 칸막이로 나눠 분자생물학 실험실 문패를 달았다. 정착자금은 전혀 없었고, 원로선생님이신 강현삼교수께서 공동연구자로 끼워 넣어주신 한국과학재단 목적기초연구에서 소성장홀몬(bovine growth hormone)유전자의 발현조절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며 연구비를 받아 정착자금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미국의 옛 지도교수와 DNA-protein interaction에 관한 국제공동연구를 하며, 첫 3년간 방학마다 미국에서 각종 실험장비와 재료들을 트렁크에 실어 나르며 실험실을 꾸몄다.

한국에 돌아와 오랫동안 지속할 연구주제를 찾던 중, 미생물학 분야의 선배 학자들과 공동연구 팀을 꾸려 그당시 과학재단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우수연구센터(SRC/ERC) 사업에 응모하게 되었다. 다양한 항생제를 생산하며 복잡한 생활사를 갖는 방선균(actinomycetes)에 대한 장기적인 연구가 필요하다는데 뜻이 모아져 하영칠, 이계준, 강사욱 교수님과 함께 세부과제팀을 만들고, 환경변화에 대한 미생물의 적응을 연구하는 분자미생물학연구센터의 총괄계획서를 제출하였고, 다행히 선정이 되어 1990년부터 9년간 연구의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귀국후 새로 시작한 방선균의 생리유전연구는 균주시스템부터 실헝방법까지 모든게 새로운 시도였지만, SRC의 안정적 지원과 국제연구 네트워크, 그리고 우수한 대학원학생들의 헌신덕분에 SRC가 종료될 즈음에는 세계적으로 앞서가는 연구결과를 낼 수 있었다.

분자미생물학 실험실 (1987-2022)

   1987년 문을 열고 35년간 지속된 연구실의 중심 주제는 환경변화에 대한 미생물의 반응/생존전략이었다. 세균(bacteria)와 진균(fungi yeast)중 대장균과 방선균, 분열성 효모의 모델균주들을 대상으로 주로 산화적 스트레스와 성장정체에 따른 유전자발현의 변화를 연구하였다. 새로운 redox sensor/regulator, metalloregulator들의 발견과 그들의 작용기작, 유전자조절경로와 스트레스 대응 단백질들의 기능을 밝히며 어느 틈에 30여년이 훅하고 지나갔다. 생명현상의 통일성(unity)과 다양성(diversity)을 고려할때, 이들 모델 균주의 대응 전략은 여태껏 우리가 알지 못했던 새롭고 독특한 현상을 드러낼 것이고(다양성 측면),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생명현상을 관통하는 일반적인 원리를 드러낼 것이란 (통일성 측면) 예상을 하며, 내가 열어가는 학문의 영역이 미미하고 작더라도 우주의 생명원리를 드러내는 지식의 연결망에서 중요한 허브가 될 것이란 믿음을 학생들과 공유하며 실험실을 운영하였다.

실험실을 열고, 대학원과 포닥때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주제로 연구를 시작하여, 국제학술지에 교신저자로 첫 논문을 내는데 까지 6년의 기간이 걸렸다. 1993년 영국미생물학회지 Microbiology (SGM)에 “The induction of oxidative enzymes in Streptomyces coelicolor upon hydrogen peroxide treatment”란 제목으로 이종수박사 (현 아주대 교수)가 제1저자로 발표한 논문은 그 다음 줄줄이 이어진 우수한 방선균 논문들의 첫 포문을 열어준 대견한 작품이었다. 그동안 분자미생물학연구실의 이름으로 발표된 논문들은 140편으로 대부분 실험실 대학원 학생들이 제1저자로 작성한 논문들로서 한편 한편 피땀어린 정성과 창조의 노력이 들어간 작품들이다. 이 논문들은 분자미생물학분야에서 꾸준히 높은 빈도로 인용되고 있고 50번 이상 인용된 논문이 50편이 넘는다. 이들 덕분에 나는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정회원도 되었고 (2008~), 미국 American Academy of Microbiology에 Fellow로 선임(2010~)되기도 하였다.

대표논문을 몇편 꼽으면, 방선균에서 산화환원에 의해 활성이 조절되는 최초의 항시그마인자를 보고한 “RsrA, an anti-sigma factor regulated by redox change” (EMBO, 1999), 대장균에서 superoxide-sensor인 SoxR을 산화된 활성상태에서 환원상태로 돌리는 시스템을 보고한 “A reducing system of the superoxide sensor SoxR in Escherichia coli” (EMBO, 2003), 대장균에서 [Fe-S] assembly를 조절하는 조절자의 산화적 활성조절에 관한 “IscR acts as an activator in response to oxidative stress for the suf operon encoding F-S assembly proteins” (Mol Micro, 2006), 방선균에서 nickel을 감지하는 조절자의 발견에 관한 “Nur, a nickel-responsive regulator of the Fur family, regulates superoxide dismutases and nickel transport in Streptomyces coelicolor” (Mol Micro, 2006), 그리고 zinc-sensor인 Zur의 구조와 zinc의 조절역할을 보고한 “Graded expression of zinc-responsive genes through two regulatory zin-binding sites in Zur” (PNAS, 2011), 등이다.

그동안 실험실을 거쳐간 학생들은 R&E 프로그램의 고등학생들과 인턴학부생들같은 단기실습생들도 꽤 많았지만, 매년 새로운 대학원생들이 입학하여 대부분 박사과정까지 긴 기간 각자의 연구주제와 씨름하며 고락을 함께 하였다. 분생방이라 줄여부르는 실험실을 통해 51명의 박사와 19명의 석사가 배출되었다. 이들은 현재 대학과 국내외 연구소, 국내외 바이오기업, 정부기관, 등에서 든든한 역할을 하고 있고, 늦둥이 몇명은 포닥 연수를 하며 향후 갈 곳을 모색중에 있다. 새로운 발견과 지식의 창출에 바친 이들의 열정과 헌신이 우리나라와 세계의 과학발전에 확고하고 큰 기여를 했다고 확신하며, 앞으로의 기여에 대한 기대감과 함께 감사함을 갖고 있다.

학내봉사

   실험실을 운영하며 다른 일에 시간을 내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나, 어쩌다 보니 내게는 학교를 위해 봉사를 해야하는 임무가 간헐적으로 주어졌고, 연차가 올라갈수록 그런 임무가 더 많이 맡겨졌다. 맨 처음의 보직은 교수 승진 직후 (1997, 만 40세), 단과대학 (자연과학대)의 학생부학장 역할이었다. 당시 학생운동이 여전히 활발하던 시기였는데, 다행히 학생회 운영진과 소통을 무난히 하면서, 2년간 학교 행정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다. 그러다, 2004년 정운찬 총장께서 연구처장직을 맡기셔서 고민끝에 수락을 하였는데, 2005년 후반부에 황우석사태가 불거지며 논문조작과 연구윤리문제를 조사하는 조사위원회의 운영과 대외소통을 담당하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서울대학을 필두로 우리나라 학계전체에 연구윤리를 교육하고 보호하는 규정과 체계가 처음으로 정립되었다. 연구처장직을 끝내고 다시 실험실로 돌아왔고, 생명과학부 학부장/BK단장, 여교수회장, 다양성위원회 창립위원장, 서울대학교 법인이사, 등을 통해 학교에서 필요한 업무에 틈틈이 봉사할 기회를 가졌다. 특히 여교수회가 발의하여 서울대학교의 총장자문기구로 출범한 다양성위원회(2016~)는 국내 학계에서 처음 설치된 기구로서, 학내 구성원과 운영의 다양성을 촉진하는 여러 업무를 제안하고 실행하는 역할을 한다. 이 기구는 설립된 직후 전국 국공립대 여교수회와 함께 교육공무원법 개정운동을 시작하여, 2020년 국공립대 여교수의 비율을 25%이상 유지하도록 하는 권고를 담은 법령이 개정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학외활동

   학교에서 연구처장직을 수행한 이후에 정부와 민간의 여러 위원회에서 주로 기초과학/연구진흥, 양성평등, 연구윤리, 과학의 홍보와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하게 되었다. 기초기술이사회 (2005~2008), 국가과학기술위원회 (2011~2013),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2013~2016), 등의 정부위원회, 포스코청암재단 (이사, 2008~2015), 카오스재단 (과학위원, 2015~), 기초연구연합회 (초대회장, 2018)와 같은 민간단체, 그리고 준정부기관인 한국연구재단 (이사장, 2018~2021), 등이다. 이중 학교를 휴직하고 3년 2개월간 근무했던 한국연구재단을 제외하면, 모두 비상근으로 수행한 활동들이다. 기초연구연합회의 경우는 한국분자세포생물학회도 중요한 창립회원중의 하나인데, 2016년 가을 BRIC에서 시작된 ‘연구자주도 기초연구확대’를 위한 국회청원운동의 후속으로 설립된 단체이다. 2016년 10월, 1500명에 가까운 연구자들의 서명으로 국회에 제출된 청원은 2017년 1월 국회본회의에서 채택되어 정부에 권고를 하게 되었고, 새로 출범한 문재인정부에서 자유공모형 기초연구비를 5년간 2배로 증액하는 국정과제를 출범시킨, 우리나라 과학기술계에서 유례가 없는 연구자 풀뿌리 운동이었다. 기초연구연합은 기초연구를 주로 수행하는 21개 학회가 모여 2018년 법인으로 출범하였고, 창의성과 다양성을 추구하는 연구환경 조성과 과학의 저변확대를 목적으로 정부의 정책을 점검하고, 의제를 발굴하며, 국회포럼을 통해 의제를 확산시키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분자세포생물학회의 회원들이 운영위원으로 많은 수고를 하고 있다.

정년이후

   ‘정년을 하고 무슨 일을 하나요’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 ‘백수가 과로합니다’ 라는 대답을 하지만, 어떤 일로 과로(?)를 하는지, 백수생활이 과연 좋은지를 묻는 질문이리라. 2022년 8월 31일자로 연구실과 실험실을 비우고 재택근무를 시작하였다. 이제 더이상 실험실은 운영하지 않는다. 마지막 졸업생의 연구결과를 논문으로 만들어 투고하는 일이 남아있긴 하다. 3월부터는 카이스트 정책대학원에서 과학정책와 관련된 1학점짜리 세미나과목을 개설하여 새로운 학생들을 만난다. 그외에 DGIST의 이사장으로서, 9월에 개교할 새로운 유형의 글로벌 대학인 태재대학의 이사로서, 여전히 대학의 혁신에 관련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과학문화확산을 하는 카오스재단의 과학위원, 30년 넘게 관여해온 민간 NGO단체(일가재단)의 일도 계속될 것이다. 이 모든 일들은 그동안 내가 받은 혜택을 사회에 돌려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서 비롯되지만, 여전히 내가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정년이후, 의무감과 관계없이 나를 위한 좋은 일도 찾아야 하지 않나. 그 중 하나는, 자연과 생명을 즐기기. 생명현상을 공부의 대상으로만 삼아왔지만, 이제는 자연의 생명을 가장 절절하게 경험하고 싶다. 그것을 위해 시골에 작은 땅을 구해 4년전 부터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아, 작은 묘목들이 얼마나 쑥쑥 잘도 크는지. 남편과 나는 주말을 목놓아 기다리며, 나무들을 만나러 가는 재미에 빠져있다. 20년후 무성한 숲을 이루어 오가는 사람들을 또 기쁘게 해줄 수 있을것이다. 나무를 기르며, 짬짬이 붓을 잡고 서예를 즐기는 여유를 찾을 수 있다면, 정년은 나에게 또 우리에게 너무나 좋은 기회이다.

저자약력